2009년 12월 21일 월요일

2001년 충주 여행

아마 2번째로 갔던 여행으로 기억된다.

당시 엄청난 잉여력으로 인해 1년 전의 한산도와 명량, 두 해전의 장소를 방문했던 경험으로 당시 의문이던 신립의 탄금대 전투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신립이 미쳤었다느니 또는 중과부적이었다느니 여러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신립의  탄금대 전투는 나에게 있어서 큰 물음 이었다.

그래서 무작정 버스를 타고 찾아간 충주.

나의 물음에 대한 실마리는 거기서 시작 되었다.


신립 
출처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3s2674a
1546(명종 1)~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 충주성 밖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왜군과 접전을 벌이다 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본관은 평산. 자는 입지(立之). 아버지는 생원 화국(華國)이다.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도총부도사·경력·진주판관 등을 지냈다. 1583년(선조 16) 온성부사로 있을 때 두만강 방면의 여진족 추장인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왔다. 니탕개는 선조 초년부터 6진(六鎭)에 자주 드나들며 공순(恭順)의 뜻을 보였으므로 정부에서 관록(官祿)을 주고 후대했으나, 진장(鎭將)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부근의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경원부로 침입, 아산보(阿山堡)와 안원보(安原堡)를 점령했다. 이에 기병 500여 명을 동원하여 첨사 신상절(申尙節)과 함께 1만여 명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 공으로 1584년 함경도북병사에 오르고 환도(環刀)와 수은갑두구(水銀甲頭口) 등을 받았다. 1587년 전라도 흥양현(興陽縣)에 침입한 왜구 격퇴를 위해 우방어사로서 좌방어사 변협(邊協)과 함께 출진했으나, 5, 6일이 지나도 적의 기척이 없으므로 철수했다. 돌아오던 중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곧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다시 기용되었다. 1588년 고미포(古未浦)의 여진족 부락을 공격하여 적병 20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으나, 이해 10월 갈파지보(乫波知堡)에서 수졸(戍卒)을 참형했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고 동지중추부사로 물러났다. 1590년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고, 이듬해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1592년에는 변방을 순시하는 임무를 맡아 경기·황해 지방을 돌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가 되어 선조로부터 보검을 하사받고 김여물(金汝岉) 등의 군관과 함께 모집한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충주로 출전했다. 충주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이 새재[鳥嶺]를 넘어 충주에서 6, 7리 떨어진 단월역까지 들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왜군의 동향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사실을 보고한 안민(安敏) 등을 군중을 현혹시킨다 하여 목을 베었다. 왜군이 충주로 진격해오자 김여물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왜군에게 밀린 많은 군사들이 퇴로가 막혀 익사하면서 전투는 참패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탄금대 전투

출처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2t1890a
임진왜란 때 충주(忠州) 부근의 탄금대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이 벌인 전투.
장소 : 탄금대 /탄금대, 충북 충주시 칠금동
1592년(선조 25) 4월 14일부터 일본군이 조선침략을 감행해, 부산·동래 등을 함락하며 북상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신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임명해 이를 방어하도록 했다. 신립은 충청도의 군현 병력 약 8,000명을 단월역(丹月驛)에 주둔시키고, 4월 24일 종사관 김여물(金汝岉) 등을 이끌고 조령(鳥嶺)으로 진출했다. 이때 김여물은 조선군의 수가 일본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인 만큼 조령의 협곡을 이용하여 기습작전을 할 것을 신립에게 권했다. 그러나 신립은 일본군이 보병인 데 반해 아군은 기병이므로 기병력을 이용할 수 있는 평지에서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그날 상주(尙州)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일본군에게 패배한 장수 이일(李鎰)이 단신으로 탈출해왔다. 신립은 이일에게 전공을 세우라고 당부했다. 4월 26일 이른 아침에 군사를 거느리고 충주성과 5리 정도 떨어진 탄금대로 가서 낮은 저습지에 배수진을 치고 적이 진출하기를 기다렸다. 한편 상주전투에서 승리를 한 고니시의 일본군대는 4월 28일 충주에 도착하여 정오경부터 한 부대는 산을 따라 동으로 침입해오고, 다른 부대는 강을 끼고 내려오면서 공격해왔다. 이에 신립은 기병을 출동시켜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대패했다. 상주에서 패주했던 이일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다시 도망쳐 패전사실을 조정에 보고했고, 이에 왕은 급히 한성을 떠났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충주성에 들어갔으며, 이튿날 뒤따라 북진하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일본군과 합세하여 한성방면으로 30일부터 북진하기 시작했다.
위키 주소 : http://ko.wikipedia.org/wiki/탄금대_전투
                 http://ko.wikipedia.org/wiki/신립




당시 인천 터미널에서 충주가는 직행 버스가 없어서 청주를 경유해서 가게 되었는데..
충주에 도착하고 나서 시외버스로 인천가는 버스가 있는 것을 알았다.

충주는 한적하지만 나름 짜임새가 있는 도시 였고 풍광이 굉장히 좋았다.
덕분에 군입대하고 난 뒤에 충주로 지원하게 된 가장 큰 배경이 되기도 했다.
뭐 당시 생각으로는 자주 나와서 충주나 또 둘러볼 생각이었지만.. ^^
군대에 대한 아주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얼마 걸리진 않았다.


열두개 라는 곳이다. 신립 장군은 여기서 필사적으로 항전하면서 왜군의 총알에 갑옷이 뜨거워지면 물에 들어가 갑옷을 식히기를 12번 결국 마지막으로 떨어진 이후에는 다시 올라오지 못했다.


열두개에 서서 본 바위 여기서 신립 장군은 왜군에 항거하면서 절망했을걸 생각하니 쓴 미소가 지어진다.


열두개에서 올려다 본 정자.


정자에서 바라본 남한강. 배수진으로 인해 도망칠 곳 없었던 병사들이 여기서 많이 익사했다고 한다.


탄금대의 전경도. 가보면 알겠지만 산성이라도 보는 것처럼 진입로가 높으며 안쪽에는 평지가 의외로 많아 다수의 군대가 주둔하기에 적합하여 진(鎭)으로 매우 적합한 땅이다.

탄금대를 보고 느낀 것은 수성과 공격을 번갈아 할 수 있는 매우 적합한 땅이라는 것이다.
방어에 있어서 유용한 높이와 탄금대 내부의 평지들은 유용한 후방 지대를 확보할 수 있다.
공격에 있어서는 여러개의 입구를 가지고 있고 선착장으로 유용한 곳도 있어 기습에 이점이 있다.

여러 사람들이 말하듯 탄금대는 단순한 배수진(背水陣)은 아니다.
병력의 입출이 자유롭고 방어에 유리한 곳이기 때문에 오히려 수성전을 펼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의문이 들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조령을 방어지로 선택했어야 하는 의문이었다.

아래는 충주에 온 김에 들렸던 충주댐.
충주에 살았었던 친구의 충고에 따라 가봤다.
걸어서..
그 친구가.. 한 한마디 [가까워] 가깝긴 가깝더라는.. 직선 거리로 20km 밖에 안되었으니..
ㅡㅡ;;;

충주댐 공원. 꽤 넓고 경치도 좋았다. 하지만 걸어서 올라가다가 뻗어버린..


생각해보면 처음으로 본 댐인듯 하다. 마침 갔을때 수력 발전용 물을 빼고 있을 때였다.


저기 옆에 물이 흘러나오는 모습이.. 나름 장관이었다.


저 물을 빼기 전에 물이 불어난다고 사이렌에 여러 차례 방송했는데.. 진짜 하류는 순식간에 물이 불어올랐다.


산을 깍아만들다니.. 인간이란.. 정말 대단한 존재인듯..


당시가 초봄이었는데.. 경치가 좋아서 한컷. ^^
디카가 일반화된 때가 아니라서 일회용 카메라로 찍은 풍경.
이 장면에 뻑가서 충주에서 군생활 하고 후회한 1인.
결론은 군생활은 절대적으로 집에 가까워야 한다.


아직 의문점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향한 당시 이름 조령(鳥嶺), 현재 이름 문경새재로 향했다.

일단 충주에서 하루 피시방에서 자고 부스스한 몸을 일으켜 친구의 충고에 따라 충주댐에 갔다가 완전히 방전된 몸을 이끌고 충주를 떠나 문경에 도착.

문경새재에 올랐다. 20km 올랐다.
당시 절찬리에 방송되던 [태조 왕건]의 촬영이 한창이었는데.. 의외로 작은 세트장에 놀랐다.
벚꽃이었던가.. 바람이 불때마다 꽃잎이 날리는 장면이 장관.



태조 왕건 세트장. 5만평이라던가.. 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의외로 작다.



문경 새재에 도착.. 온김에 한번 올라봤다.
원래 사진에서는 찍었지만 지금 가지고 있지는 않은데.. 신립이 조령에 도착해 작전회의를 했다고 알려진 곳도 있었다.


제 2관문. 임진왜란 이전에 있었던 관문이다.
아마 신립이 이곳에 웅거하고 저항했다면 이곳에서 싸웠으리라.


측면에는 시내가 흐르는데.. 지금 지어진 돌 다리가 없었다면 공성에 꽤 까다로웠을듯.


이때까지 산성이라던지 여러개를 보았지만 이 관문에 미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임진왜란 당시에 어느 정도 규모인건지는 알 수가 없지만 성이 위치한 곳만 하더라도 수십명 단위 이상은 투입하기가 까다로웠을 듯 하다.


문경새재의 일반적인 지형. 길 이외에는 1인 이더라도 이동할 곳이 많지 않을 정도로 산이 험하다.


제일 위의 제 3관문. 올라가다가 죽어버리는 줄 알았다.

3관문위에 올라서야 알았다. 그 험난함을.. 그리고 신립이 가졋던 생각을..

누가 봐도 조령은 방어지로서 최적의 요건을 가지고 있었다.

수만의 대군이 쳐들어와도 실제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많아야 수백명 수준. 그나마도 대부분이 분산되어 싸우게 되어 대군의 이점을 살릴 수 없는 곳이다.

말 그대로 신립의 정예병 같은 일기당천의 용사가 그 수풀과 성벽 사이에 숨어서 날래게 싸우게 되면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사가 제아무리 히데요시의 정병(精兵)이라고 하더라도 오랜 기간 싸울 것이고 결국 그 기세가 꺽여 차츰 반격에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설사 진다고 하더라도 고니시의 부대는 크나큰 출혈을 겪을 것이고 결국 그 기동성을 상실하고 한양으로 진격하지 못하리라.

이것이 신립을 비난했던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신립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넓은 지도를 가지고 있었다.(라는게 내 생각이다.)

당시 군위를 거쳐가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일에 지휘하기로 했던 부대가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의 접근에 의해 와해되었고 이일이 부대도 없이 상주에서 전투를 하게되는 원인이었으니 신립같은 베터랑 군인이 그 사실을 놓쳤을리 없다.

만약 신립이 조령에서 수성에 치중하여 고니시를 물고 늘어졌다면 가토는 우회하여 한성으로 직격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병력이 없는 한성은 무혈함락되게 되는 것이다.

신립의 임무는 8천명의 훈련 안된 병력으로 고니시의 1만 8천명과 가토의 2만명을 막기 위해서는 내선의 이점을 살려 각개격파만이 답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가두는 조령 보다는 남한강의 이점과 전술적 지형의 이점을 볼 수 있는 충주의 탄금대가 이상적인 해답이다.

신립의 생각에서는 고니시의 군대를 격파하고 한성쪽으로 이동해 한성으로 진격하고 있거나 충주로 접근하고 있을 가토의 군대를 이기지는 않더라도 돈좌시키기만 하더라도 작전의 성공일 것이다.

하지만 고니시는 신립에 못지않은 명장이었고 대기병전술을 아주 효율적으로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탄금대 전투에 대한 여러가지 사료들이 엇갈려 진술되고 있어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은 할수 없다.)

어쨌든 신립은 패배했고 그의 대한 적절한 평가는 주어지지 않은 것 같다.

이 여행에서의 내 결론은 신립의 내선을 응용한 방어로 귀결되었고 나름 만족을 얻은 채로 집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때의 여행을 회상하면 진짜 재미있었던 거 같다. 역사의 한 인물이 겪었던 고뇌와 절망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고 알았다는 기분과 그가 느꼈던 기분이 교차되어 조금 슬펐던..

그런 기억이 지배하는 여행이었다.


댓글 1개:

익명 :

멋져요 ~ 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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